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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마라토너 - 유일한님

2004.08.12 10:42

김병헌 조회 수:134

인용블로그 http://blog.naver.com/killercell/140004167197

출처 : 어느날 갑자기

작가 : 유일한






- 흔히들 마라톤은 인간에게 무한한 인내와 끈기를 요구하는
가장 아름다운 운동 중에 하나로 꼽는다.
하지만 마라톤은 그 기원부터
인간의 생명을 요구했다....



상구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6시에 일어났다.
옆자리에선 여동생 상아가 가느다란 숨소리를 내면서 잠들어 있었다. 상구는 잠든 상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상아는 하루게 다르게 야위어 가고 있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먼저 일어나 비록 찬은 없지만 아침밥을 차려 준다며 법석을 떨었는데...


오천만 원이면..
상구는 하나뿐인 여동생 상아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솔직히 그 동안 은행강도 같은 것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짓을 해 가지고서는 상아를 살릴 수 없을 것 같았다. 행여 상아가 일어날까 조심스레 출근 준비를 했다. 세수를 하고 방에 들어와 조심스레 옷을 갈아입는데 상아가 뒤척이다가 눈을 떴다.


“오빠, 벌써 일어났네.
오늘은 내가 먼저 일어나 아침 차려 주려고 했는데??. 오빠, 미안해.”


졸음이 가시지 않은 음성으로 상아가 중얼거렸다. 하루하루 초췌해 가는 상아의 얼굴을 보니 상구는 가슴 한 자락이 찌르르르 울려 왔다.


“자식, 걱정은.. 너나 몸조리 잘해. 밥 걸르지 말고...
오늘 오빠가 퇴근할 때 너 좋아하는 파인애플 사올 테니까...”


“애들처럼 파인애플은??. 오빠, 오늘도 뛸 생각이에요?”


“그럼! 뛰는 게 얼마나 좋은 건데??.”


“누가 좋은 걸 모르나. 잘 먹지도 못하면서 뛰니까 그러지.
그러다 쓰러지면 어떡해?”


“상아야, 나는 걱정 마. 원래부터 오빠는 통뼈잖아.
너 귀찮더라도 꼭 점심 찾아먹어라. 약도 꼬박꼬박 챙겨먹고.”


“알았어! 무슨 일 생기면 주인 아줌마에게 부탁하고, 연탄가스 조심하고, 낯선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게.”


“짜식이 내가 할 말을 지가 다하네.”


상구는 청마루에 앉아 운동화끈을 단단히 동여맸다. 가을이라 그런지 아직은 아침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상구는 점퍼의 지퍼를 올리고 빨간 녹이 슬어 바삭거리는 철대문을 열고 나섰다.


“오빠, 잘 다녀와요!”


상아가 청마루로 상체를 내밀고 나뭇가지처럼 야윈 손을 흔들었다. 마주 보며 손을 흔들지만 마음은 손처럼 가볍지 않았다.


이제 고작 열여덟인데... 전교에서 10등 안에 들었다고 그렇게 좋아하더니... 조금만 더 하면 오빠 고생 시키지 않고 장학금 받으며 대학 갈 수 있다고...


찌린내 나는 골목을 빠져 나가다 보니 코끝이 찡해 왔다. 매일 아침마다 느끼는 감정이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골목을 빠져 나와 그나마 제법 큰 길로 나온 상구는 숨을 고르며 시계를 보았다. 마을 버스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잔뜩 움츠린 채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하철역까지는 걸어가면 대략 40분 정도 걸렸다. 하지만 상구는 늘 뛰어다녔다.


어제 기록은 7분 32초였다. 상구는 오늘은 7분 30초 안에 도착하리라 마음먹고 뛰기 시작했다. 내리막을 뛰어가는 것은 오르막을 뛰는 것만큼이나 체력 소모가 컸다. 차를 피해야 하는 데다 커브가 심하고, 증가하는 가속도를 조정해야 하니 평지에서 달리는 것보다 두 배는 더 힘들었다. 아침을 안 먹은 빈 속이어서 속이 비록 허하지만 기분은 더없이 상쾌했다. 뛰다 보니 어느새 지하철역이 보였다. 상구는 구멍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가빠지려는 숨을 몰아쉬었다. 기록을 체크해 보니 7분 28초였다. 지금까지 잰 기록 중에서 제일 좋은 기록이었다.


“아침 날씨가 선선하지.”


가게 주인 아줌마가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상구는 싱긋 웃으며 냉장고에서 그날 들어온 신선한 우유를 하나 꺼내 마셨다. 상구에게는 그 우유가 어떤 보약보다도 값진 아침 식사였다. 처음에는 우유값도 아까워 절약했으나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서 보름 전부터 사 먹기 시작했다. 지하철은 이른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갈아탄 전철에서도 상항은 마찬가지였다. 상구는 지하철 안에서 선 채로 눈을 감고서 휴식을 취했다. 전철이 안산역에 멈추자 수많은 사람들이 공장으로 출근하기 위해서 내렸다. 지하도를 나오자 분주한 걸음으로 버스 정류장으로 몰려갔다. 상구는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어가는 김 계장에게 인사했다. 술고래로 유명한 김 계장은 어제도 한잔 했는지 얼굴이 푸석푸석했다.


“오늘도 뛰어서 가려고?


오늘은 피곤한 것 같은 같이 버스 타고 가지 그래?”


“피곤하기는요. 전 괜찮습니다. 저는 뛰는 게 좋은데요, 뭐...”


상구는 꾸벅 인사를 하곤 뛰기 시작했다. 역에서 상구가 일하고 있는 공장까지는 버스로 약 25분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버스가 돌아가는 거리를 감안한다 하더라라도 7, 8km는 족히 되리라. 상구는 그 거리를 매일 뛰어서 출근한다. 공장 동료들은 처음에는 약간 이상한 놈 취급했지만 상구는 개의치 않았다. 상구로선 버스비도 절약할 수 있고, 운동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이다. 상구는 달리면서 가끔 버스 안을 들여다보았다.



만원 버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표정을. 꾸벅꾸벅 조는 사람들의 힘겨운 고개짓을. 공장 사람들은 아무도 상구가 아침마다 느끼는 기분을 몰랐다. 얼굴에 부딪히는 상쾌한 바람, 떨어지는 가로수잎이 밟힐 때의 그 감촉, 이마 위로 드리워진 차가운 하늘, 발 아래 밟히는 단단한 아침을??. 달리다 보니 비록 숨은 찼지만, 이 아침에 깨어 있다는 자부심이 가슴을 뿌듯하게 했다. 상구가 빠르게 달려가자 살아온 날들이 상구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스쳐 지나갔다.


상구는 길가의 감나무를 보았다. 허공을 사르던 빨간 감들. 아버지의 닭들이 전염병에 걸려 맥없이 쓰러져 갈 때에도, 농협 빚을 시달리던 아버지가 농약을 마시고 피를 토하던 그날 밤도, 저수지에 몸을 던져 퉁퉁 불은 어머니를 이불에 싸 가지고 집안으로 들이던 그 밤에도 감나무는 하늘가에 그렇게 작은 불꽃으로 매달려 있었다. 구슬피 통곡하던 상아 앞에서 약한 오빠의 모습을 보이기 싫어 상구는 매번 감나무에 매달린 빨간 감만 넋놓고 바라보았다.



어머니마저 야산에 묻던 가을 상구는 고등학교 이학년이었고, 상아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농업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대한민국에서 가장 예쁜 야생화를 재배해 수출할 꿈을 꾸던 상구는, 그 꿈을 잠자리 날개에 고스란히 실어 멀리 띄워 보냈다. 상구는 상아와 함께 서울로 왔다. 사글세 방을 얻어 놓고 상구는 공장에 다녔고, 상아는 학교에 다녔다. 상아는 오빠의 마음을 아는지 공부를 잘해 줬고, 상구는 대학생이 되어 있을 상아를 상상하며 잔업이며 야간이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해서 돈을 모았다. 통장에 돈은 불어갔고, 상아는 가을 하늘처럼 티없이 자라났다. 상구에겐 더없이 행복한 날들이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지난 여름부터 상아는 자주 두통을 호소하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상구는 상아를 데리고 병원을 전전했다. 여러 개의 병원을 돌아다닌 결과 상아의 병명이 밝혀졌다. 상구로서는 생전 들어본 적이 없는 희귀한 병이었다. 의사는 흔치 않은 병이라 국내에서는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미국에 건너가서 전문가에게 가족의 골수를 이식하는 수술을 할 경우 살아남을 확율은 반 정도 된다는 것이었다.


상아가 살아남을 확율은 50%. 상구로서는 당장이라도 미국으로 건너가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수술비를 포함하여 제반 경비가 칠천만 원만 원 가량 든다는 말을 듣는 순간, 상구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상구에게는 오백만 원도 엄청나게 큰돈이었다. 그런데 칠천만 원이라니. 상구는 파랗던 세상이 일순간에 시꺼멓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어디를 둘러봐도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절망, 한치 앞도 분별하기 힘든 시꺼먼 절망뿐이었다.



매일 저녁 상아가 잠든 뒤에 상구는 신께 빌었다. 상아를 살려 주시고 나에게 그 병을 내려달라고. 밤새 몸부림 치며 기도를 했지만 신은 아무런 응답도 내려 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상아에게 비밀로 했으나 눈치 빠른 상아는 이내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곤 밝게 웃으며 상구를 오히려 위로했다. 오빠를 놔 두고 결코 혼자 가지 않을 테니까 아무 걱정 말라며. 상아의 미소는 상구에게 용기를 주었다. 최선을 다해서 살다 보면 어딘가에 분명 또다른 탈출구가 있을 것 같았다.


저만치 공장이 보였다. 상구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 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공장 정문으로 들어서며 시계를 보았다. 24분 48초. 잡념에 시달린 때문인지 기록이 저조했다. 공장 안으로 들어서니 8시 32분이었다. 작업 시간보다 18분 일찍 온 것이다. 세수하고 나서 작업복으로 갈아입으 뒤 다리 근육을 풀었다. 8시 50분이 되자 스피커에서 음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나왔다. 그와 함께 메인 스위치가 켜지고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 왔다. 상구는 자신의 라인으로 갔다. 특별한 기술이 없는 상구가 하는 일은 박스를 포장하고 나르는 단순 노동이었다.


박 조장이 라인 식구들을 모아 놓고 새로 들어온 아르바이트생을 소개시켜 줬다. 박 조장은 상구에게 일을 가르쳐 주라며 말쑥한 대학생을 배당해 주었다. 상구가 머쓱해 있는데 대학생이 먼저 와서 싹싹하게 인사를 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제법 부유해 보이는 집안의 자제 같았다. 상구는 잠시 상아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박 조장이 작업 개시를 알렸다. 상구는 대학생에게 공장에서 만들어진 전자제품을 포장하는 방법과 이동 중에 주의할 점을 대략 알려 주었다. 그리곤 묵묵히 일을 했다.


상구는 대학생에게 반감을 느꼈다. 나이는 비슷하지만 신분이 다른 데서 오는, 이쪽은 생계를 위해서 일하는데 저쪽은 심심풀이로 일을 한다는 차이에서 오는, 일종의 적대감이었다. 일을 하다 슬쩍슬쩍 훔쳐보았다. 대학생은 서툴지만 일은 열심히 하려 했다. 아줌마들이 대학생에게 간간이 말을 붙였다. 나이는 예상했던 대로 상구와 동갑이었다. 그는 해외 여행 경비에 보태기 위해서 일주일 가량 일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해외 여행이라. 예전에는 부유층만 다녔으나 지금은 많이 일반화되어 있다는 것을 상구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도 툭하면 보여 주는 것이 해외 풍경이니까. 그만큼 우리가 잘 살게 되었다는 건지도 모른다. 웬만한 사람들은 한번씩 다녀 왔다는 해외 여행??. 언론에서는 한 해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공항을 빠져 나갔고 외국에서 얼마씩 쓰고 왔다고 떠들어대지만 상구에게는 아직도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렸다. 상구 주변 사람들 중에서 아직 해외 여행을 갔다온 사람은 아직 단 한 명도 없으니까...


하지만 상구가 그 대학생을 멀리 하는 것은 해외 여행을 간다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호화 여행이 아닌 배낭 여행이라면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도 많이 나갔다 오는 게 좋다는 것쯤은 상구 역시 잘 알았다. 상구가 대학생이 묻는 말 이외에는 단 한 마디도 먼저 붙이지 않는 것은 상아 때문이었다. 여동생이 돈이 없어 죽어가고 있는데 여행 간다는 대학생을 붙잡고 웃고 떠들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보이지 않는 적대감이 그들로 하여금 그 대학생을 멀리하게 했다. 그래서 그는 쉬는 시간에도 혼자서 담배피고, 그들의 얘기자리에 끼지 못했다. 하지만 일할 시간이 되면 묵묵히 열심히 일했다. 보다못한 상구가 다음 시간에 가서 말을 걸었다. 말을 해보니, 좋은 사람같아 보였다. 대학생이라고 자랑하는 빛도 안 보이고, 오히려 상구가 일에 한해서 선배라고, 선배대접까지 하는 것이었다. 나이는 동갑이며, 이름은 일한이라고 했다. 아까 멀리서 들은대로 집안사정때문에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자금 벌기 위해 한 일주일 정도 일한다는 것이었다.



상구는 이 대목에서 그의 여유에 대한 질투를 느꼈지만, 잠시뿐이었다. 그 일한이라는 사람은 자기들보다 더욱 성실히 일했다. 덕분에 상구도 더 열심히 일해야 했다. 생긴 것과는 달리 서글서글한 성격에 상구는 그와 금새 친해졌다.


저녁 여섯시가 되자 박 조장이 잔업 의향을 물어 왔다. 상구는 서슴지 않고 손을 들었다. 밤 아홉시까지 일하면 칠천 원을 더 벌 수 있었다. 한 달 내내 쉬지 않고 잔업과 특근을 하면 그 돈만 해도 자그마치 삼십만 원 가량 됐다. 상구와 함께 일을 하던 일한이라는 대학생은 먼저 약속이 있다며 정시에 퇴근을 했다. 상구는 옷을 갈아입고 퇴근하는 대학생의 뒷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음 생애가 주어진다면, 그때는 정말로 저 대학생처럼 칠천 원에 구애받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 보고 싶었다. 대학생이 빠져 나가서 그런지 매일 하는 잔업인데도 시간이 유난히 더디게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차피 일주일 동안은 매일 느껴야 할 감정이었다. 그에게는 훌쩍 떠날 자유가 있으나 상구에게는 자유가 없으므로. 공장 천장이 유난히 높아 보였다.


마침내 시끄러운 음악이 멈추고 웅웅거리는 기계음도 멎었다. 상구는 세면가로 가서 깨끗이 씻은 뒤 옷을 갈아입었다. 공장 안에서 부품을 조립하던 어린 아가씨들이 길게 기지개를 켜면서 나왔다. 상구는 그들 틈에 섞여 공장문을 나섰다. 상구는 길게 늘어지려는 몸을 추스려 다시 역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노동에 지친 긴 그림자를 끌고서 드문드문 켜 있는 가로등을 벗삼아 달렸다. 상아의 얼굴을 빨리 보고 싶은 조바심에 속력을 높였지만 역의 모습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가서 동네 역에서 내린 아침에 우유를 산 가게에서 파인애플 통조림을 샀다. 통조림을 옆구리에 끼고서 마을버스가 달리는 길을 따라서 달리기 시작했다. 상구는 발 밑을 살피며 달렸다. 산동네로 이어진 소방도로는 콘크리트가 군데군데 패여 있어 발 밑을 조심해서 달려야만 했다. 자칫하다가는 발을 접찔릴 수도 있었다. 발이라도 삐는 날에는 모든 게 물거품이 되기 때문에 극도로 조심해야만 했다.


상구는 가슴속 깊은 곳에 목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한 달 뒤에 열리는 마라톤 대회의 우승이다. 사실 상구는 그 동안 한번도 마라톤 코스를 완주해 본 적이 없었다. 학교 다닐 때 마라톤 선수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구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오로지 상금 때문이었다.
우승 상금은 미화로 7만불이었다. 대충 8천만 원이 넘는 액수였다. 그 돈이면 상아의 수술비로 충분했다. 의사는 확율은 50%라고 했지만 상구 생각에는 수술만 하면 곧바로 나을 것 같았다. 아니, 반드시 나을 거라고 믿었다. 상구는 달리기 선수는 아니었지만 달리기라면 자신 있었다. 어릴 적에도 10리가 넘는 학교 길은 뛰어다니곤 했었다.


아니, 상구에게는 달리기에 자신 있고 없고를 떠나서 선택은 오로지 하나뿐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해서 상금을 타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상구,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믿었다. 꾸불꾸불 이어진 골목 앞에서 상구는 숨을 돌렸다. 이제 고통스런 하루가 끝난 것이었다. 상구는 물 먹은 솜처럼 늘어지려는 육신을 끌고서 골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아는 책을 읽고 있었다. 상구는 마치 야유회라도 갔다온 사람처럼 상아에게 웃음을 띄웠다. 마루에다 내려놓으려고 보니 파인애플 통조림이 땀으로 반들거렸다. 상구는 상아 몰래 통조림에 묻은 땀을 닦았다. 부엌에서 상아가 상을 차리는 동안 상구는 웃도리를 벗고 몸을 씻었다. 하루하루 말라가는 동생??. 신발이 도리어 커졌다며 멋쩍게 웃던 상아의 미소가 세수대야에 아른거렸다.
상야야, 조금만 기다려! 오빠가 너의 건강을 찾아 줄 테니까.


일주일은 금방 지나갔다. 그동안 상구는 그 일한이라는 대학생과 친해졌다. 상구의 입장에선 처음으로 만나보는 같은 또래의 대학생이었다. 더구나 혜민과 만나는 동안 그 대학생에 도움을 많아 받았다. 이제는 혜민도 상구의 정체에 대해서 알게 되었지만, 처음에는 그 대학생의 도움으로 상구역시 짧았지만, 엘리트 대학생 노릇을 할 수 있었다. 혜민이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프지만, 상구로서는 살아오면서 너무 많은 것들을 포기해왔기 때문에, 혜민이 역시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일한이라는 대학생이 술 사겠다는 제의에 상구는 그날 하루는 달리기도 포기하고, 어딜 데려갈까라는 일말의 호기심과 기대감도 갖게 되었다. 마지막 날, 그 대학생은 상구에게 자기가 술 사겠다고 했다. 당연히 거절해야했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대학생과의 술자리는 가고 싶었다. 마음 한쪽 구석으로는 대학생을 만나, 말로만 듣던 좋은곳에서 술 마실 것은 기대감도 거절을 못하게 했다.


강남에서 만나기로 했다. 사실 상구는 혜민과 만날 때 빼고는 처음으로 강남에 갔다. 사석에서 처음만난 그 대학생은 공장에서와는 좀 다른 모습이었다. 상구는 괜히 위축이 되는 기분이었다. 대학생이 데리고 간 술집은 상구와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곳이이었다. 허름한 실내포장 마차였다. 상구가 회사 사람들 따라 가끔 갔던 선술집들과 별로 다를 바 없었다. 안주나 가격이나 비슷했다. 저 멀리 있는 것만 같던 그 대학생과 좀더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술과 안주를 시키고 있는데 그 대학생 친구들이 들어와 합석을 하게 되었다. 서로 인사는 했지만,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흘렀다. 곧 그들은 자기들끼리 대화를 시작했다. 그들의 대화를 언뜻 들어보니, 많은 고민이 있어보였다. 술로 그 고민을 해결해보려는 사람들 같았다. 상구는 언뜻 그들의 사치한 고민에 괴리감을 느꼈다. 하지만 알코올 기운이 오름에 따라 생각도 바뀌었다. 사람은 사람 나름대로 고민이 있고, 자기 생각에는 그 고민이 가장 괴롭게 느껴지는 것으로.... 또 그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는다고... 이들은 술에서 그것을 찾고 있지만, 나는 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상구는 그들 대학생에 대해 일말에 우월감까지 느껴졌다.



기분이 좋아지니, 술이 맛있어졌다. 오래간만에 취할 때까지 마셔본 술이었다. 사실 술이 취하니까, 병상이 있는 동생과 티없이 맑게 웃는 혜민이의 얼굴이 교차되면서 생각났다. 상구는 고개를 새차게 흔들었다. 지금 상구로서는 올라가지도 못할 나무를 보고 미련을 갖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되었다.


헤어질 때 그 대학생들과 연락처 교환을 했지만, 상구는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는 버렸다.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오는 길에서 상구는 달린다는 것에 더욱 많은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평범한 대학생들과의 만남이 그것을 심화시켰는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그들에게 가졌던 열등감의 해소의 일환일 수도 있었다. 그 대학생들은 좋은 사람같았다. 상구는 소위말하는 계층이나 계급은 물질적 분류보다 서로에게 지니게 되는 고정관념에서 출발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대학생들도 평소에 자기가 지녔던 이미지와 너무 판이하게 달랐다. 소비적이고, 향락적인.. 아니면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투쟁하는... 그들은 결코 이 두 부류로 분류 못할 단지 평범한 대학생들이었다. 하지만 상구는 그들과 본질적인 이질감을 느꼈다. 여하튼 이들과의 만남은 상구에게 있어서 달리는 것의 의미를 더 확대시키는 계기였다.


상구는 그 대학생의 빈 자리로 인하여 한동안 허전함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공장 안을 울리는 카세트 테이프가 돌아가듯, 기계가 자동으로 움직이듯 모든 것들이 시간과 함께 예전으로 되돌아갔다. 상구는 직장과 가정으로 쉴새 없이 달렸다. 돈과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회식 자리도 빠져 가며 오로지 달렸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영화를 보러 가는 사람들 사이로, 달콤한 말을 속삭이며 사랑을 나누는 연인과 한잔 술에 취해서 천하를 쥔 듯이 호령하는 취객의 곁을 지나서, 오로지 마라톤 우승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렸다. 그 사이에도 상아의 병세는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어 갔다. 담당 의사는 수술 시기를 미루면 미룰수록 성공 확율 또한 떨어진다며 안타까워 했다. 상구는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하루하루 미라처럼 말라가는 상아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미어졌다.


상구는 일요일에 모처럼 특근을 나가지 않았다. 상아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배낭에 물통에 넣고 집을 나섰다. 동네 약수터에 가서 물통에 물을 채웠다. 잠실에 차를 타고 도착하니 아침 여덟시 반이었다. 날씨는 바람도 심하게 불지 않고 아주 선선했다. 장거리를 뛰기에는 아주 적합한 날씨였다. 상구는 몸을 천천히 풀었다. 이 주 앞으로 다가온 시합을 앞두고 완주를 해 보기 위해서였다. 코스는 한강 고수부지의 자전거 도로로 잡았다. 잠실에서 여의도까지 왕복해 볼 작정이었다. 집을 나서면서 이 정도 코스면 21km는 족히 될 거라고 계산해 놓은 곳이 있었다.


시계를 보고 있다가 정확히 아홉시에 출발했다. 등에 비록 배낭을 맸지만 몸은 한없이 가볍기만 했다. 휴일 아침을 맞아 조깅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간간이 보였다. 뛰다 보니 강바람이 제법 강하게 불어 왔다. 상구는 시계를 자주 들여다보며 한강을 끼고서 일정한 속도로 달렸다. 이번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하려면 늦어도 2시간 7분 안에는 들어와야 했다. 출전 선수들의 기록을 살펴보고 상구가 내린 결론이었다. 42.195km를 2시간 7분 안에 완주하려면 1km를 3분 안에 뛰어야 했다. 10분쯤 달리다가 상구는 목표를 바꿨다. 일단 기록보다도 완주에 의미를 두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았다. 오늘 완주만 할 수 있다면 여러 명이서 뛰는 시합 때는 좋은 기록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전거들이 스쳐 지나가고 차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상구는 멀리 보이는 63빌딩을 향해 달렸다. 달리다 간간이 배낭에서 물통을 꺼내 목을 축였다. 반환점인 63빌딩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서서 뛰기 시작했다. 한 시간을 넘게 뛴 것 같은데도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21km 정도는 출퇴근할 때 자주 뛰어 봤던 거리였다. 반환점을 돌아서 한참 달리다 보니 체력에 한계가 느껴졌다. 물통을 자주 꺼내서 조금씩 마셨지만 체력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출발할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등에 지고 있는 배낭이 엄청나게 무겁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던져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황영조 선수가 이야기했듯이 여기서부터는 정신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구는 초라한 방에 누워 있을 상아를 떠올렸다. 이를 악물고서 앞을 향해 달렸다. 35km는 넘어선 것 같았다. 머릿속은 뛰어야 되겠다는 느낌뿐 하얗게 비워져 있었다. 상구는 기계적으로 손발을 놀렸다. 강바람이 점점 강하게 느껴졌다. 괴로웠다.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상구는 계속해서 뛰었다. 달리는 마라톤 선수를 보면서 무척 괴로울 거라는 생각은 어느 정도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전혀 몰랐었다. 가장 힘들다는 40Km를 넘어선 것 같았다. 출발 지점이 저만치 보였다. 상구는 이를 악물고 막판 스퍼트를 했다. 관중들의 환호성도 박수도 없었다. 스타트 라인에 발을 디딘 상구는 잔디밭으로 가서 벌렁 누웠다. 숨이 차서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완주를 했다는, 마침내 해냈다는 기쁨이 고무풍선처럼 텅 빈 것만 같은 뱃속으로 서서히 들어찼다. 그것은 이내 환희로 바뀌었다. 시합 때도 오늘 정도로만 뛰어 준다면 우승을, 아니 상아를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상구는 한동안 누워 있다가 일어섰다.



세상이 먹물을 뿌려 놓은 듯 시꺼멓게 보였다. 손상된 체력은 쉽게 회복될 것 같지 않았다. 상구는 일어나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가루가 되어 전신이 부서져 내릴 것처럼 괴로웠지만 부지런히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한시라도 빨리 상아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 싶었다. 이 주일만 있으면 수술을 받을 수 있으니, 괴롭더라도 참으라고?. 용기를 잃지 말라고??. 집으로 돌아가니 상아가 깜짝 놀라며 상구를 맞았다. 상구의 몸은 말이 아니었다.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얼굴은 온통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상아야! 내가 오늘 완주했어.”


상구는 목이 메여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상아는 오빠의 한 마디를 듣고서 모든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오빠가 하고 싶어하는 말까지도?. 상아는 상구의 손을 꼭 잡았다. 고깃국 한번 제대로 끓여 주지 못했는데 그 먼 거리를 뛰어준 오빠가 더없이 고마웠다. 상아는 오빠가 마라톤에서 우승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다만 희망을 버리지 않는 오빠가, 최선을 다해서 자신을 살리려고 하는 오빠가 더없이 자랑스러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상아도 상구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마라톤 코스를 한 번 완주하고 나서 체력을 완전히 회복하려면 적어도 한 달 이상 쉬어야 한다는 것을..


상구는 시합을 일주일 남겨 놓고 접수를 했다. 접수를 하러 나가면서 박 조장에게 살짝 이야기를 했는데 돌아와 보니 공장내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들은 상구가 왜 마라톤대회에 나가야 하는지 그 이유까지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공장 사람들은 상구를 마라토너라 불렀다. 그들은 상구에게 격려의 말을 건네기도 했으며 삶은 계란이나 우유 등을 몰래 작업복에 넣어 주며 ‘화이팅!’을 외치기도 했다.



상구는 사흘 가까이 완주를 한 후유증으로 절뚝거려야 했다. 몸이 서서히 회복되는 기미가 보이자 다시 훈련에 들어갔다. 같은 라인에 배치된 동료들은 상구는 힘든 일에서 빼 주었다. 한 사람이 빠지면 그들이 그 만큼 더 힘들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상구였기에 처음에는 극구 만류했지만 그들의 따뜻한 마음씨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공장에서 충분하지는 못하지만 그런 대로 휴식을 취하다 보니 몸의 회복 속도도 빨라졌다. 시합을 나흘 남겨 놓은 날이었다. 잔업이 끝나고 집에 가려는데 평소에 짠돌이로 소문난 박 조장이 상구를 몰래 불렀다. 박 조장은 그를 데리고 보신탕집으로 데려 갔다.


“여동생이 많이 아프다며? 달리 도와 줄 건 없고. 이거나 많이 먹어. 그리고 꼭 일등해, 알았지?”


상구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어느 누구보다도 박 조장네 살림살이를 잘 아는 상구였다. 박 조장이 짠돌이로 소문난 것은 성품이 그래서가 아니라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였다. 박 조장은 삼 형제 중 둘째였다. 중풍에 걸려 반신불수가 된 아버지를 모시고 세 자녀 교육시키려면 단돈 십 원도 아껴 써야 하는 처지였다. 먹고 싶은 대로 실컷 먹으라고 했지만 상구는 목이 메어서 고기를 삼킬 수가 없었다. 시합이 이틀로 다가왔다. 퇴근하려는 상구 주변으로 같은 라인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철이 엄마가 선물꾸러미를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들고 뭔가 풀어 보았다. 운동화였다. 오래 전부터 갖고 싶었지만 감히 비싸서 엄두도 못 냈던 운동화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상구는 고맙다는 말 대신에 운동화를 쓰다듬었다.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우승해서 상금 타면 한 턱 내라고!”


눈물을 보이기 싫어 고개를 푹 떨구고 있는데 누군가 등짝을 치면서 말했다. 그 순간, 참고 참았던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상구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반드시 우승으로 보답하리라고 마음먹었다.


시합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같은 라인 사람들의 배려로 상구는 오전 일만 한 뒤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상아를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살금살금 대문을 들어섰다. 상아는 방문을 열어 놓고 두 손을 모은 채 기도를 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보는 상아의 모습이었다. 상아는 더없이 경건한 표정을 짓고서 입술을 달짝거렸다. 상구는 기도가 끝날 때를 기다렸다가 마당에 둘어섰다. 그날 저녁 상구는 상아와 함께 나란히 잠자리에 누웠다. 잠을 푹 자야 하는데 긴장한 때문인지 좀처럼 잠이 쏟아지지 않았다. 낮에 기도하던 상아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상아야, 너 오늘 누구에게 기도했니?”


“오빠 봤구나. 아빠랑 엄마에게??. 우리 오빠를 지켜 달라고 기도했어. 오빠, 난 괜찮으니까 내일 무리하지 마, 알았지?”


“상아야, 걱정 마!


오빠는 내일 반드시 우승할 거야. 그래서 네 병을 고쳐 줄 거야.”


“고마워, 오빠! 난 오빠 맘 알어. 난 몸은 비록 아프지만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 오빠, 내일 뛰다가 힘들면 그만둬. 알았지?”


“그래.”


“내가 오빠 추리닝에서 부적을 붙여 놨어.”


“부적? 네가 어디서 그걸 구했어?”


“응, 주인 아줌마에게 부탁했어. 용하다는 무당이 있다 길래 오빠가 걱정돼서 한 장 구했어. 오빠를 지켜 줄 거야.”


“상아야, 내 걱정 마! 뛰다 힘들면 그만 둘 테니까...”


상구는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마음에 없는 말을 했다.
상아는 망설이다가 힘들게 얘기를 꺼냈다.


“오빠, 그 예쁜 언니 이제는 더 이상 만나지 않아? 지난 번에 우리집에 놀러 온 언니....”


“어, 그 사람... 만나고 안 만나고 그런 사이 아냐. 그냥 회사에서 일로 만난 동료야. 그 친구도 나보고 우승하라고 전화했더라.”


상구는 상아가 혜민이와 끝난 것을 알면 가슴이 아플 것 같아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고 있는 상구 자신 역시 가슴이 찟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상아는 다행이라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면서 한마디 했다.


“다행이다, 오빠.. 나는 그 언니랑 오빠랑 사귀고 있는데, 우리집에 와서 이렇게 누워있는 나를 보고 오빠랑 헤어진 줄 알고 얼마나 걱정많이 했는데... 오빠 이제 나 신경쓰지 말고 그 언니랑 연애 좀 해봐. 나 이제 아무렇지도 않는다니까. 오빠도 늙기전에 연애 한번 해 봐야지?”


“임마, 늙기는 누가 늙어. 아직 팔팔한 20대야. 너나 빨리 일어나서 남자 친구 좀 데리고 와서 이 오빠랑 술 한잔 하게 좀 만들어 다오.”


상구는 상아와 이런 대화를 할 때 마다,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슬픈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음날 있을 대회에서 우승만 한다면, 상아의 병도 고칠 수 있고, 영원이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혜민과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잡념에 시달리다가 가까스로 잠이 들었는데 어디선가 신음소리가 들렸다. 상구는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불을 켜 보니 상아의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마치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창백했다.


“상아야, 정신 차려! 괜찮니?”


흔들어 보았지만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시계를 보았다. 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상구는 상아를 들쳐 업고 뛰었다. 차를 잡아타고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주치의는 병원에 없었다. 상아의 진료카드를 유심히 읽던 의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상아에게 포도당 주사를 놓아 주었다. 그리곤 주치의가 출근할 때까지 응급실에서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상아는 밤새 고열에 시달리며 신음을 내뱉었다. 상구는 상아 곁에서 밤을 꼬박 세웠다. 병실 창으로 새벽 햇살이 비쳤다. 시합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 포기해야 하는가?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기횐데.. 상아 곁을 떠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시 없을 이 기회을 놓쳐 버릴 수도 없고??. 상구는 상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갈등했다. 밤새 신음을 토하며 헛소리를 하던 상아가 열이 조금 내렸는지 힘겹게 눈꺼풀을 밀어올렸다.


“오빠, 몇 시야?”


“의식이 좀 드니? 조금만 참아. 의사 선생님이 곧 오실 거야.”


“오빠, 그 동안 노력 많이 했잖아. 나 걱정 말고 시합에 나가 봐. 일등 같은 거 안 해도 돼. 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뛰어 줘. 상아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상구는 상아의 말을 듣고 결심을 굳혔다.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상아의 생명은 살릴 길이 없었다.


상아야, 조금만 참아! 오빠가 꼭 우승할 테니까...


상구는 간호원에게 상아를 잘 돌봐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리곤 병원을 나와서 집으로 향했다. 잠은 제대로 못 자서 컨디션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그런 걸 생각할 계제가 아니었다. 출발 시간은 열시였다.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상구는 집에서 추리닝으로 갈아입고 운동화를 신었다. 그 위에다 점퍼를 걸치고 잠실 주경기장으로 향했다.



출발 지점인 잠실 주경기장 안은 수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마라톤에 참가하는 선수들, 방송국 사람들, 응원 나온 사람들로 메인 스타디움은 시끌벅적했다. 상구는 점퍼를 벗어 가방에다 넣었다. 부적을 달아놓았다는 티셔츠 앞을 내려다보니 노란 실로 ‘오빠 화이팅!’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다른 선수들이 우습다는 듯이 힐끔힐끔 쳐다보았으나 상구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가슴이 따뜻해지고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줄을 서서 번호표를 받았다. 상구는 675번이었다. 옷핀으로 두 장의 번호표를 앞뒤에다 붙였다. 이윽고 출발시간이 되었다. 상구는 일반인 출전자였으므로 선수들로부터 150m 후방에서 출발해야 했다. 상구의 앞쪽에는 전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건각들이 출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대략 200여명쯤 되어 보였다.



상구는 출발 재미삼아 참가한 4천명의 시민 사이에 껴서 출발 신호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상구의 옆에는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도 있었고, 국민학생들도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느긋해 보였다. 어차피 참가에 의의를 둔 그들이었기에 뛰다가 피곤하면 천천히 걸어가면 될 터였다. 긴장감을 떨쳐 버리기 위해 상구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짧은 순간, 오늘 이 순간을 위해서 땀 흘렸던 수많은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수술을 무사히 끝마친 상아의 환히 웃는 모습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탕!


마침내 출발 신호가 떨어졌다. 그 소리와 동시에 8천개가 넘는 다리가 일제히 앞을 향해서 나아갔다. 상구는 스피드를 내서 일단 유명 선수들과 함께 합류해야겠다고 계획을 세웠다. 전력 질주를 해서 상구는 선두 그룹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상구를 슬쩍 돌아보았을 뿐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았다. 텔레비전에 한번 나오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촌놈으로 여기는 눈치였다.



상구는 마라톤 코스를 표시하는 파란 줄만 보고 뛰었다. 앞쪽에 방송 차량이 보였다. 상아를 비롯해서 자기를 응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구는 그들을 위해서 앞으로 나섰다. 카메라가 상구를 비췄다. 상구는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이들을 향해 슬쩍 웃음을 띄웠다. 하지만 카메라는 순식간에 상구를 스쳐 지나갔다. 렌즈가 비추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강력한 우승후보 케냐 선수가 뛰고 있었다.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지 않은데 저 앞에 10km 표지판이 보였다. 상구 앞에서 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방송 차량이 앞서 가고 가끔씩 헬기가 상공을 날아갈 뿐이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20여 미터쯤 뒤쪽에서 열대여섯 명이 무리를 지어 뛰어오고 있었다. 방송에서 자주 보았던 국내외의 유명 선수들이었다. 상구는 그들과 합류해서 뛸까 하다가 방심하다가는 우승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계속 선두를 유지하기로 작정했다.


마라톤 해설자로 나온 김병국은 머리가 혼란스러워짐을 느꼈다. 카메라맨은 계속해서 낯선 젊은이를 비추고 있었다. 전혀 마라톤 선수 같지 않은 촌스러운 사내를. 참가번호 675번이 달릴 때마다 연도에 선 많은 시민들이 의아한 눈길로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마라톤 중계 해설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은 한 달 전이었다. 흔쾌히 방송사의 제의를 수락했고 참가선수 개개인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며 우승 후보자를 뽑아 놓았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날씨도 쾌청했고 개인적으로 몸 컨디션도 좋았다. 기분 같아서는 선수들과 같이 뛰어 보고 싶을 정도였다. 총소리와 함께 선수들이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김병국은 방속국 스튜디오 안에서 아나운서와 함께 수신되어 오는 화면을 보며 해설을 해 나갔다. 준비해 온 선수들의 기록을 소개해 주면서 오늘 우승 후보를 조심스레 점쳤다. 3km를 지나면서 전혀 뜻하지 않은 선수가 카메라에 비쳤다. 김병국은 낯선 얼굴에 적이 당황하다가 참가번호를 보고 일반 참가 선수라는 것을 알았다. 김병국은 이내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마라톤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한 시민이 선두 대열에 합류했군요. 한국 마라톤이 오늘날처럼 세계 강국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저런 분들의 열렬한 호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에, 그렇죠. 외국의 경우를 보면 한 도시에서 마라톤이 개최되면 도시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참가를 해요. 그래서 마라톤 대회를 축제 분위로 만들죠. 오늘 많은 분들이 참가했지만 보다 많은 시민들이 참가했으면 좋겠어요.”


미리 준비해 온 자료에 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대로 받아 넘길 수 있었다. 피디가 잘했다고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카메라는 다시 마라톤 현장으로 넘겨졌다. 한국의 건각들이 세계의 건각들과 나란히 달리는 장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675번이 다시 화면에 비춰진 것은 8km 지점이었다. 이번엔 675번이 선두였다. 김병국은 삐쩍 마른 사내가 대단한 체력을 지녔다고 내심 감탄했다. 조만간 지쳐 뒤로 처지겠지만 일반 참가자로써 저 정도 뛸 수 있다는 건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김병국은 저런 페이스라면 오래 가지 못할 거라고 점쳤는데 675번은 예상을 뒤집고 계속 선두를 유지했다. 카메라는 자주 그를 비쳤다.



675번에 대해서 아는 자료가 없기에 675번이 화면에 나오면 김병국은 아나운서와 함께 가벼운 농담을 주고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자 김병국은 짜증이 났다. 매끄럽게 해설을 하고 싶었는데 뜻하지 않은 방해자가 생긴 것이었다. 김병국은 울컷 치솟는 짜증을 누르고 열심히 준비해 온 자료를 주고 받으며 아나운서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15km를 넘어섰지만 675번은 여전히 선두를 지키고 있었다. 준비해 온 기록을 비교해 보았다. 15km까지는 세계 기록보다 30초가 빨랐다. 김병국은 675번을 ‘이상한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상한 청년 덕분에 다른 선수들의 기록도 세계 기록보다 27초 가량 빨랐다.


곧 뒤로 처지겠지.


김병국은 달리는 사내의 엉성한 폼을 보며 생각했다. 손발을 놀리는 폼이나 보폭, 호흡하는 방법으로 봐서는 마라톤을 전혀 모르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마라톤에 대단한 소질이 있어 보였다. 대단히 강한 심장과 대단히 강한 정신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라톤은 과학이었다. 예전에는 뚝심만 좋으면 얼마든지 우승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달랐다. 과학적으로 훈련을 받지 못한다면 아무리 뛰어난 자질을 지닌 선수라 하더라고 세계 기록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 80년대 이후에 자리 잡아 가고 있는 보편화된 논리였다.



이봉주나 황영주등 마라톤 신화를 새운 선수들은 과학기술이 집약되어 특별제작된 1억이 넘는 신발을 신고 기록에 도전해왔다. 그런데 이 선수는 몇 만원 안 되 보이는 신발을 신고 선두로 달리고 있었다. 마라톤은 과학의 승리라는 논리가 다시 깨어지려 하고 있었다. 마라톤 경기의 반쯤 되는 20km를 지났지만 ‘이상한 청년’는 여전히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기록을 비교해 보니 20km까지의 구간 기록은 세계 기록보다 1분이나 빨랐다.


오늘은 시합 전날일 거야.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거고.
김병국은 화면에 가득 비친 사내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충혈된 두 눈, 꽉 다문 입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몸짓을 지켜보며 고개를 저었다.


‘오빠 화이팅!’


가슴에 노란 실로 새겨진 글자가 클로즈업 됐다.
저 청년은 왜 달리고 있는 걸까?


문득, 강한 의혹이 김병국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김병국은 피디를 보았다. 피디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에프디가 카메라가 마라톤 현장을 비출 때 종이 쪽지를 가지고 와 아나운서 앞으로 내밀었다. 아나운서가 재빨리 눈으로 훑은 뒤 읽어 나갔다.


“네 지금, 방송국에는 675번을 단 선수가 누구냐는 전화가 빗발쳐 업무가 마비될 지경입니다. 참가자 명단을 금방 입수했는데 그곳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군요. 성명은 최상구, 나이는 23세, 직업은 태양전자 직원. 이상입니다. 다른 자료가 입수되는 대로 알려 드릴 것을 약속드리며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화면은 선전으로 바뀌었다. 선전이 끝나고 다시 중계가 이어졌다. 현장 모니터를 보니 675번이 여전히 선두였다. 에프디가 허겁지겁 뛰어와서 메모지를 내밀었다. 아나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메라는 마라톤 현장에서 방송국으로 옮겨졌다. 아나운서가 메모지를 읽어 나갔다.


“네, 지금 또다른 중계차가 675번 최상구 선수의 공장으로 나가 있다는군요. 잠시 연결해서 최상구 선수에 대해서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김하운 리포터!”


아나운서가 소리를 지르자 준비되어 있던 모니터에서 여자 아나운서가 나타났다. 김병국은 마라톤 우승이 확정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방송국에서 발빠르게 움직인 걸 보면 뭔가 있긴 있는 모양이라고 추측했다. 김병국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미모의 리포터가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특근을 하고 있는 열악한 공장 안으로 들어섰다. 일을 하고 있던 한 아줌마에게 최상구 선수를 아느냐고 물었다.
“물론이쥬. 상구 청년이 지금 선두라면서유. 저희들도 시방 라디오로 중계를 듣고 있구만유. 상구 청년이 꼭 우승해야 할 텐디...
상구 여동생이 지금 몹쓸 병에 걸려 있구만유. 상구 청년은 동생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대회에 참가했어라. 꼭 우승해서 하나뿐인 혈육인 여동생의 병을 고쳐 주겄다고.”


짧은 인터뷰였지만 대단히 감동적인 내용이었다.



카메라맨은 다시 카메라를 클로즈업시켜 ‘오빠, 화이팅!’이란 글씨를 비쳤다. 카메라는 다시 헬기로 옮겨졌다. 헬기에서 내려다본 거리에는 놀랄 만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최상구 선수의 달리는 모습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도로로 개미떼처럼 쏟아지고 있는 중이었다. 김병국은 현장으로 연결된 모니터를 보았다. 최상구는 30km를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도 속도는 조금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30km까지의 구간 기록은 세계 기록보다 2분이나 빨랐다. 온몸에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50년을 마라톤과 함께 해 온 김병국이었지만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카메라는 중계 도중에 다시 병원으로 연결했다. 중환자실에서 링겔을 꽂고 있는 최상아 양의 모습이 비춰졌다. 간호원은 최상구 선수가 최상아 양 곁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 줬다.


김병국은 간호원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목안에 물컹한 것이 걸리는 것을 느꼈다. 최상구 선수가 뛰는 걸 중단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빠르게 스쳤다. 하지만 김병국은 강한 전류에 감전된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를 앙다물고 달리고 있는 최상구 선수의 깡마른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 외에는?.
카메라는 다시 거리로 나갔다. 서울역 앞에서는 기차를 타려던 수많은 시민들이 텔레비전 앞에 모여 있었다. 탑승하라는 방송이 연신 울렸지만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상구 선수 화이팅!”


아기를 업은 시골스런 아줌마가 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화이팅’을 외쳤다. 카메라가 돌아가며 여러 사람을 비췄다. 최상구의 역주를 지켜보며 몰래 눈시울을 닦는 사람이 반이 넘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여동생을 위해 불사르고 있는 한 청년의 몸부림은 계속되고 있었다. 헬기가 시내를 비췄지만 거리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움직이는 차량도 몇 대 되지 않았다. 카메라는 이번에는 시외버스터미널로 옮겨졌다. 그곳에서는 대대적인 응원이 벌어지고 있었다. 상기된 사람들이 모두 한목소리로 ‘으쌰, 으쌰!’를 외치며 최상구를 응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가 된 목소리는 잠겨 있었고 울음이 뒤섞여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최상구 선수를 응원하고 있었다.


다시 현장으로 카메라는 옮겨졌다. 카메라는 더 이상 유명 선수들을 비추지 않았다. 카메라는 오직 최상구 선수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김병국은 입술을 꽉 다물고 달리는 ‘마라토너’를 바라보았다. 그의 이마에 파란 힘줄이 불끈 솟아 있었다. 김병국은 경험을 통해서 잘알고 있었다. 최상구 선수가 지금 얼마나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지를?. 그는 지금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대로 놔두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중지시켜야 해! 안 돼!


들뜬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김병국은 마른 입술을 적셨다.


상구는 35km 구간을 지났다.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발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었지만 계속해서 달렸다. 창자는 터질 듯이 팽창과 수축을 반복했다. 창자는 끊어지는 듯했고 팔과 다리는 마비되어서 자신의 육신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쇠덩어리를 달고 달리는 기분이었다. 연도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뭐라고 외쳤지만 무슨 소린지 웅웅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상구는 주저 않고 싶은 유혹을 끊임없이 느꼈다.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면 더 이상의 고통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상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멈추면 상아는 죽어. 상아를 살리기 위해선 멈추면 안 돼. 어머니, 아버지, 저에게 힘을 주세요!
도로를 밟는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송곳 위를 달리는 기분이었다. 있는 힘을 다해서 달리고 있는데 한 선수가 상규 앞으로 나섰다. 세계 기록 보유자인 케냐 선수였다. 상구는 위기 의식을 느꼈다. 뒤로 한번 처지면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상아야!


상구는 마음속으로 있는 힘을 다해서 소리쳐 불렀다. 그리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입술이 찢어졌는지 비릿한 핏물이 입안으로 스며들었다. 상구는 있는 힘을 다해서 달렸다. 핏물이 앞섶을 적셨다. 케냐 선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40km를 넘어서며 그를 따돌리는데 성공했다.



상구는 속력을 늦추지 않고 계속해서 달렸다. 이제 남은 것은 2.195km였다. 조금만 더 참으면 상아가 살아날 수 있다는 어렴풋이 생각이 들었다. 달리다 보니 연도에 선 사람들의 아우성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땅이 심하게 출렁거렸다. 나무도 움직였고 도로변의 쓰레기통도 움직였다. 상구는 쓰러지려는 몸의 중심을 가까스로 바로잡았다.


케냐 선수와의 처절한 선두 다툼에서 최상구 선수가 앞장섬에 따라 그의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케냐 선수와의 거리가 순식간에 30미터 이상 벌어지자 스튜디오 안은 물론이고 거리도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김병국은 가슴이 답답한 것을 느끼며 최상구 선수의 사투를 지켜보았다. 힘겨운 싸움을 치러 보았기에 최상구가 얼마나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아내가 믿는 하느님에게 기도했다. 최상구 선수를 조금만 더 지켜 달라고. 만일 기도만 들어 준다면 당신을 평생 모시겠노라고.
마음속의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어어?”


아나운서의 다급한 외침에 김병국은 눈을 번쩍 떴다. 최상구가 비틀비틀거리더니 옆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서 거품이 흘러내렸다. 최상구 선수의 의식이 줄 끊어진 연처럼 모두 날아가 버린 것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끝났어! 모두.


김병국은 눈을 질끈 감았다. 현장으로 달려가서 그가 더 이상 뛰지 못하도록 말렸어야 했다는 후회감이 스며들었다.
한동안 정적이 이어지더니 요란한 박수소리가 났다. 눈을 떠 보니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최상구 선수가 놀랍게도 다시 일어나고 있었다. 김병국은 자기 눈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다시 달렸다. 연도의 시민들이 우뢰와 같은 함성을 울렸다. 하지만 그는 몇 걸음 가지 못했다. 다시 옆으로 맥으로 나가자빠졌다. 누가 보더라도 그가 더 이상 뛰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최상구 선수는 불사신처럼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그는 공동묘지에서 다시 살아난 유령처럼 흐느적거리며 다시 달렸으나 이번에는 반대 방향이었다. 달려왔던 길을 되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바른 길로 잡았다. 최상구 선수는 몸을 비틀거리며 달리다 이번에는 연도로 뛰어들었다. 그리곤 앞으로 쓰러졌다.


방송 차량과 함께 달리던 구급차가 달려왔다. 그를 들것에 실으려는 순간, 그는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났다. 간호원의 손을 뿌리치고 그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연도의 시민들이 처절한 광경에 모두들 눈물을 터뜨렸다. 가로수에다 자신의 머리를 박으면서 오열하는 중년신사의 모습도 비쳤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시민들이 울먹이며 ‘최상구! 최상구!’를 외치는 상황에서 그는 도로에 다시 쓰러졌다. 김병국은 카메라가 비추는 코앞의 잠실 주경기장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상구는 전신에 마비증상이 오는 것을 느꼈다. 차가운 아스팔트가 이불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상아야, 기다려. 오빠는 결코 쓰러지지 않아. 널 기어코 살리고 말 거야. 너도 나처럼 마음껏 달릴 수 있게.


가슴 안쪽에 실로 박아 놓은 부적이 느껴졌다. 한순간, 자신을 응원하고 있을 이웃 사람들과 공장 동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혜아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상구는 다시 일어났다. 눈앞에 보이는 메인스타디움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환히 웃는 상아의 얼굴이 상구를 인도했다.


- 오빠 힘들면 그만둬. 무리하지 말고.
- 걱정 마, 상아야! 오빠는 할 수 있어. 암, 할 수 있고 말고.


잠실 주경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환호성도 박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오직 상아의 웃는 얼굴뿐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트랙을 한바퀴 돌고 결승 테이프를 끊으면 되는 것이었다. 상구는 트랙을 돌기 시작했다. 몸에서 이상하게도 힘이 솟구쳤다. 앞에 하얀 테이프가 보였다. 상구는 테이프를 끊고 나서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박수소리도 환호성도 들리지 않았다.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침통할 뿐이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히 금방 끊은 결승선 테이프도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상구는 옆에 서 있는 카메라 기자에게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어 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장내 방송이 울렸다.


“신사 숙녀 여려분, 대단히 애석한 속보입니다. 처음부터 놀라운 투혼으로 선두를 유지하던 최상구 선수가 41.4km 지점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으나 사망했습니다. 최상구 선수는 여동생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불 살렀던 진정한 마라토너였습니다. 우리 모두 최상구 선수의 명복을 빌면서 이 시대 최고의 마라토너에게 박수를 보냅시다.”


그 순간, 상구는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들 제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는 것을. 그들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어느 대회의 우승자도 감히 받지 못한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상아의 환히 웃는 얼굴이 주경기장 위로 드리워졌다.


그로부터 육 개월 뒤 잠실 주경기장 관리인 유씨는 텅 빈 경기장을 찾은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 한 명은 육상협회 이사인 김병국 씨였고 동행한 아가씨는 처음 보는 스무 살 남짓한 아가씨였다. 유씨는 오늘따라 왜이렇게 텅빈 경기장에 사람이 찾아오는지 의아해졌다.



바로 전에도 어떤 젊은 아가씨가 혼자 경기장을 찾았다고 눈물을 흘리며 떠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육상협회 이사라는 얘기를 듣고, 유씨는 그 동안의 불만을 알릴 생각으로 그 두 사람 있는 쪽으로 향했다.
김병국 씨가 층계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동안 아가씨는 추리닝 차림으로 천천히 트랙을 돌았다. 이제는 달릴 정도로 몸이 건강해 보였다.


관리인 유씨는 김병국씨에게 몇달 사이에 밤마다 발생했던 이상한 얘기해 대해 불평하듯 말했다.
“그렇다니까요! 벌써 여러명이 수위 자리를 그만 두었어요..


밤마다 텅빈 경기장에서 누군가가 헉헉되며 달리는 소리가 들린다는 소문이 있어요... 누군가는 그 소리가 여기서 죽은 젊은 마라토너의 혼령이라고도 하던데요...”


김병국씨는 그 얘기를 믿는지 안 믿는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트랙을 돌아보던 아가씨는 슬픈 표정을 하고 김병국 씨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여기가 오빠가 그렇게 달리고 싶어 했던 결승선 트랙이었나요?”


김병국 씨는 빈 트랙을 돌아보며 따뜻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 상구씨는 상아씨가 여기를 달릴 수 있다는 것을 보고 자기가 우승한 것 보다 더욱 기뻐하고 있을 거예요. 사람들도 이렇게 건강한 상아씨를 보기위해 성금을 거두었고....”
관리인 유씨는 김병국씨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더욱 화가 났는지 얘기를 계속했다.


“그래서, 이사님, 이 귀신 소동을 어떻게 처리할꺼예요?”


김병국씨는 관리인을 보고 몸을 일으키며, 따뜻한 미소를 지어내며 대답했다.


“그거 귀신이 아니라,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결승점을 향해 포기하지 않고 뛰는 젊은 마라토너의 치열한 모습일거예요... 넘어져도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다시 뛰는...”